Book/Essay2015. 7. 16. 19:30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처음 읽은 것은 군대에 있을 때였다. 당시 국군병원에 얼마간 입원해 있었는데,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는 일 밖에 없었다. 밤에는 한적한 국도변에 켜져있는 가로등 불빛을 내려다 보다가, 이따금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노트를 꺼내서 외롭다는 말을 길게 길게 풀어 적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에야 병원 7층에 도서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는 하루에 두세 권의 책을 읽어나갔다. 생애 가장 많은 책들을 읽은 기간이었다.


나는 소담 출판사에서 나온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는데, 당시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읽고 있었고, 이상하게 독일 문학에 몰두하고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이 소설을 읽고서 "예술의 정수는 그 하나의 이야기가 수천 명에게 적용된다는 데 있다"고 하며 극찬했다.


그리고 얼마 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책장에 책이 없는 걸 알았고, 알라딘 중고서점을 검색해보았다. 민음사 판이 한 권 있었다. 나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책을 구입해왔고, 출퇴근하는 전철 안에서 베르테르가 빌헬름에게 보내온 편지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소설은 괴테가 직접 겪은 일, 즉 약혼자가 있는 샤로테를 사랑하다가 그녀를 떠나야했던 이야기와 비슷한 일로 자살을 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뒤섞어 만든 것이다. "괴테는 어떤 인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그 상대방 앞에서 보이는, 겉으로 보기에 분명히 친절한 태도(알고 보면 더없이 잔인하지만)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각주:1]


문학이 일종의 예방접종 같은 게 될 수 있을까. 어떤 슬픔을 문학적으로 대리경험함으로써 그 슬픔을 실제로 맞딱뜨렸을 때 우린 좀 더 쉽게 이겨낼 수 있을까. 또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그 슬픔을 문학에서 접함으로써 나의 슬픔이 나만의 슬픔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베르테르 효과란 말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역시 군대에 있을 무렵 읽었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으며 약 9년 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책장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예전의 나는 미도리와 같은 여자를 만나 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나는 미도리를 찾던 게 아니라 미도리처럼 살고 있었다. 미도리는 생각보다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어떻게 보면 가장 상처투성이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우리는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각주:2]


우울한 이야기다.


인간은 과연 삶을 통해 더 나아 지는 것일까. 대단한 무엇도 필요치 않고 살면서 단 한 명의 인간에게 진심으로 사랑받고 싶다. 그런데 살아가다보니 그건 정말이지 너무 대단한 일로 보인다. 

 


  1. 알랭드 보통,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생각의 나무 [본문으로]
  2.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 p.387 [본문으로]
Posted by 한혜윰